“이것만 정리하면 끝인가?”
“네, 여기 있는 게 다예요.”
이사 가자. 그 말을 실현시키기까지 딱 1년이 걸렸다. 스물다섯 그리고 스물여섯, 둘 다 이십 대의 반환점을 돌았을 무렵에야 비로소 ‘우리’의 공간이 생겼다. 쇠뿔도 단김에 빼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는 안 됐다. 자취방 계약이 아직 남아 있었거니와 마음에 드는 집을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둘이 살 곳이다 보니 따질 것도 두 배라. 무엇보다 이제 막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든 남자 둘의 경제력으로 서울에서 적당한 집을 구하기? 밤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다. 그나마 동현이 또래에 비해 형편이 나았으니 망정이지. 그가 호언한 대로 올림픽 이후 열심히 노를 젓지 않았더라면, 시간이 더 걸렸거나 그대로 단칸방 신세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솔직히 이사하는 거 진짜 귀찮아.”
“…….”
“혼자여도 귀찮은데 둘이니까 더해.”
그리하여 마련하게 된 소중한 13평짜리 집. 거실은 조금 작지만 방이 두 개. 무려 방이 두 개. 월세는 반반 하기로 했다. 상혁이 제가 더 내겠다고 했으나 동현의 강력한 반대로 결국 무산됐다. 동거 관련해 부모님들께는 친구와 좋은 조건으로 룸 셰어를 하게 됐다고 대충 둘러댔다. 혼자보다는 둘이 낫다며 안심하시는 모습에 무어라 더 말은 못 하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었다.
“그래도…… 난 좀 설렜는데.”
동현이 은근슬쩍 말대꾸를 했다. 상혁은 박스 안을 뒤적이다 말고, 옆에 앉은 동현에게 힐끔 눈길을 주었다. 무드 없는 군소리가 서운했던지, 동현의 입술이 조금 부루퉁했다. 코끝으로 픽 웃음이 샜다. 웃기고 귀여워서 그랬다. 하여간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 봐, 사람 말을 끝까지 안 듣지.
“그러니까 다음번엔 자가로 하자고.”
상혁은 동현의 머리꼭지에 손을 툭 얹었다.
“앞으로 둘이서 돈 많이 벌자.”
아까 하려다 못 했던 말을 뒤늦게 덧붙였다. 그제야 시무룩하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이럴 때 보면 스물다섯을 먹었어도 애였다. 천상 제가 끼고 살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손에 잡히는 머리통을 익숙하게 쓰다듬곤, 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척의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피곤한 눈을 비비며 한숨 돌리자니 어렴풋이 빗소리가 들려왔다. 이사가 다 끝난 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건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너 은퇴하면 어디 한적한 데 가서 살아도 좋겠다.”
“형은 이다음에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요?”
“음, 글쎄.”
“다들 로망 하나쯤은 있던데. 마당이 있다든가, 창문으로 바다가 보인다든가…….”
“뭐, 그러면 좋긴 하겠네.”
머지않아 매트리스가 한 번 더 출렁였다. 동현이 상혁을 따라 침대에 몸을 쓰러트렸다. 성인 남자 둘이 누워도 공간은 충분했다. 이사를 준비하며 이런저런 의견 충돌이 꽤 있었는데, 침대만은 한맘으로 큰 사이즈를 고른 덕분이었다. 이제 팔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었다. 물론 빡빡하게 뒤엉켜 잠들던 때도 나쁘지 않았다마는.
“근데 바다가 안 보여도 괜찮아.”
상혁은 돌아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어도 상관없어.”
작게 속삭이곤 동현의 손을 쥐었다. 천장을 향해 있던 시선은 곧 유유히 방 안을 배회했다. 정갈한 세간살이들이 보였다. 그리 거창하진 않아도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온전히 우리만을 위한 보금자리. 누구에게나 로망은 있다. 누군가는 지붕이 빨간색이기를, 누군가는 언덕 위에서 살기를, 또 누군가는 앞서 말했듯 마당이 있거나 바다가 보이기를 꿈꾼다. 그리고 제게도 아마 로망 하나쯤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손을 잡기 전에는.
“나도 그래요.”
상혁의 머리맡을 짚은 동현이 상체를 기울였다.
“어디든 좋아.”
매끈한 이마에 제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뗐다. 많은 것이 필요치 않았다. 맘껏 살아 숨 쉴 수 있는 열세 평, 그거면 충분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게 멋들어진 풍경이 아니라도 괜찮았다. 그조차 서로의 곁에서 바라보면 한 폭의 그림이 될 테니.
둘이서 함께, 그것이 우리의 로망이었다.
아쿠아맨 外
Red Friday
상상과 현실은 대체로 다를 확률이 높다. 경험상 현실은 상상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기 마련이었다. 동거라는 것도 그랬다. 머릿속으로 그리던 동거와 몸소 겪는 동거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상상보다 훨씬 더…… 좋았다. 원래도 같이 살다시피 해서 새삼스러울 것이 있겠느냐고 생각했지만, 같이 살다시피 하는 것과 진짜로 같이 사는 것엔 엄연한 차이가 있더라. 둘만의 공간에서 함께 맞이하는 아침과 보내는 밤은 특별했다.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같이 살면 후회하기 십상이라던데, ‘진작에 같이 살걸.’ 하는 후회만 드는 요즘이었다.
일주일 중에 단 하루만 좋은 날이 있어도 꽤 괜찮은 인생일 테다. 원체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살이니. 그렇다면 일주일 내내 좋은 날인 삶은 얼마나 근사한 삶인가. 동거를 시작한 지 갓 세 달. 둘이서 달리 하는 것도 없건만 희한한 일이었다. 이상하리만치 매일매일이 충만했다. 그리고 뜨거웠다. 마치 어느 저녁녘의 금요일처럼. 그래, 마치 금요일인 것처럼 여트막한 흥분과 내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하나에서 둘이 되었을 뿐인데, 판에 박은 듯 단조롭던 매일매일이 타오르는 금요일 밤 같았다.
“오늘 갔던 식당 괜찮지.”
“네, 맛있었어요.”
주에 몇 번, 상혁은 동현의 마중을 나갔다. 한두 번 재미로 나갔던 것이 어느 순간 횟수가 늘었다. 늘 그렇듯 특별한 볼일이 있지는 않았다. 가끔 외식을 하거나 길거리 농구 코트에서 노는 정도. 귀갓길엔 버스로 몇 정거장 거리를 함께 걸었다. 중간에 육교를 지날 땐 습관적으로 잠깐 멈춰 섰다. 거기서 해가 늦게 저무는 날이면 일몰을, 해가 일찍 저무는 날이면 야경을 구경했다.
“진짜야?”
“진짜죠.”
“넌 매번 좋다고만 하니까.”
“좋은 걸 어떡해.”
상혁은 고개를 틀어 동현을 올려다봤다. 눈초리에 못 미더운 기색이 역력했다. 동현이 결백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상혁이 베고 누운 그의 허벅지도 같이 들썩거렸다.
“저번에 누나 만나서 처음 갔었거든.”
“…….”
“크게 기대 안 했었는데 맛있더라고.”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상혁은 말을 이었다. 반동에 흘러내린 고개를 꿈적꿈적 움직여 단단한 허벅지 위에 도로 얹었다. 동현의 한 손이 자연스레 상혁의 정수리를 감쌌다.
“그래서 먹는 내내 네 생각이 났어.”
상혁이 눈을 반짝 치켜떴다.
“너랑 같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가지런한 속눈썹이 보스스 일어났다. 상혁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현의 손길이 느려졌다. 그는 슬쩍 풀어지는 얼굴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텔레비전 불빛이 반사된 눈동자가 색색이 반질거렸다. 눈이 똑바로 마주치는 순간이 좋았다. 눈을 마주치고서 “네 생각이 났어.”라고 말해 줄 때면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무심결에 입술 쪽을 곁눈질했다. 목울대가 의미심장하게 꿈틀댔다.
“그거 맛있냐?”
그때 문득 상혁이 어딘가를 턱짓했다. 동현의 반대편 손에 들린 막대 사탕이었다. 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서 사 온 거였다.
“나도 먹어 볼래.”
“……아, 여기―.”
동현의 반응이 반 박자 늦었다. 새 사탕을 집으려고 소파 팔걸이에 눈길을 주었을 땐, 이미 상혁의 팔이 뻗어 나온 뒤였다. 상혁은 무방비한 동현의 손을 잡아채 제 입가로 당겼다. 그러고는 동현이 먹던 사탕을 거리낌 없이 입에 물었다.
“그거 내가 빨았던 건데.”
“더한 것도 빨았는데, 이제 와서?”
둥글게 오므린 입술 틈으로 진분홍색 사탕이 들락거렸다. 언뜻언뜻 비치는 혀가 색소로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갔다. 한입 깨물면 단물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또 한 번 넋을 놓고 그 모습을 감상하다 동현은 고개를 숙였다. 사탕을 머금은 입술 위로 제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키스에 상혁은 당황하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입술을 열곤 동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사탕을 사이에 두고 혀가 질척하게 비벼졌다. 후덥지근한 숨에 단단하던 것이 맥없이 녹아내린다. 사탕과 함께 핥아 올린 입안에선 달콤한 체리 맛이 났다.
“하아…….”
콧잔등을 맞대고 색색거렸다. 명치가 찌르르 울리는 느낌에 어깨를 움칠 떨었다. 상혁의 손이 동현의 입가를 더듬었다. 사탕 막대에 짓눌린 입꼬리가 빨갰다. 엄지로 살살 쓸다 입술을 가져갔다. 목마른 키스를 퍼부었다.
“하고 싶어?”
상혁이 달뜬 목소리로 물었다.
“난 지금 존나 하고 싶어.”
아니, 질문이 아닌 도발이었다. 그리고 동현은 거기에 기꺼이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대답하는 대신 다시 입술을 겹쳤다. 이번에는 조금 더 깊고 천천히, 단내 나는 입안을 머금어 본다. 어설프게 쥐고 있던 막대 사탕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안 지는 8년, 사귄 지는 3년, 같이 산 지는 3개월. 누군가는 그쯤 되면 단물 다 빠졌을 거라고 말한다. 사랑, 그것도 다 한철이라고. 그러나 시간이 얼마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다디단 체리 맛 사탕처럼.
서로의 존재는 여전히 대책 없이 달기만 하다.
―
[친구들 좀 만나고 올게]
간혹 익숙함에 속아 당연하지 않은 걸 당연하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어저께는 마중 나온 형이랑 오랜만에 심야 영화를 즐겼다. 그저께는 센터 근처 공원에서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셨고. 근래에는 대부분 둘이 함께였었다. 그래서 동현은 오늘도 당연히 형과 평소처럼 노닥거릴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때가 되면 자신을 마중 나올 그를 생각하며 온종일 들떠 있었다.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갈 거야]
그러나 동현을 기다리고 있던 건 상혁이 아닌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몇 시간 전의 메시지를 굳이 다시 열어 본 동현의 얼굴이 시큰둥하게 쌜룩거렸다. 미련이 남아 자꾸 핸드폰을 들었지만, 그 후로 상혁에게선 더 연락이 없었다. 알았다는 답장조차도 아직 확인하지 않은 채였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가 오죽 컸으면 저쪽에서 방방 뛰던 이들이 듣고 돌아볼 정도였다.
“야, 너 아직도 꽁해 있냐?”
통, 통. 농구공이 얕게 튀며 발치로 굴러왔다. 그 뒤를 공을 굴린 두 녀석이 따랐다. 같은 서울 팀에서 운동하는 동료들이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얼굴에 삐졌다고 써져 있구먼.”
운동화 앞코를 건드리는 공을 동현은 가볍게 때렸다. 그러자 다시금 탄력적으로 솟구쳐 오른다. 눈높이까지 올라왔을 때 휙 낚아채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렁슬렁 걷다가 조금씩 속도를 높여 뛰었다. 머잖아 그물이 가까워지면 팔을 위로 뻗고 점프. 손목을 꺾자 손안의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백보드를 치더니 아슬아슬 둥근 테를 따라 돌았다. 들어갈까 말까 실컷 밀고 당기기를 한 다음에야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꼴랑 하루 못 만나는 걸로 서운해하고 그러냐.”
“…….”
“이 자식, 몰랐는데 은근히 집요한 구석이 있네.”
그물을 흔들고 흐른 공은 힘차게 바닥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어느새 코트로 돌아온 한 녀석의 손아귀에 안겼다. 공을 잡은 그가 천천히 드리블을 시작했다. 라인 밖에 멀뚱히 서 있던 동현이 걸음을 뗐다. 드리블하는 동료의 앞을 막아서며 자세를 낮추었다.
“후, 연애란 자고로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 거야.”
“……나 3점 남았다.”
“목매는 남자? 그거만큼 멋없는 것도 없어.”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던 농구 코트가 해 떨어진 지금은 한산했다. 덕분에 마음껏 뛰어놀 수 있었다. 끼익, 밑창이 바닥을 예리하게 긁어 댔다. 한동안 공을 주거니 받거니,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밥값 걸고 오래간만에 하는 내기 농구였다. 물론 상혁이 있었다면 성사되지 않았을 내기이기도 했다.
“집요하게 굴면 오히려 달아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라니까?”
동현은 원래 공을 다루는 데는 젬병이었다. 그런데 상혁이 농구를 좋아했고, 종종 같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실력이 늘었다. 상혁은 농구뿐만 아니라 모든 구기 종목에 강했다. 결국은 돌고 돌아서 또 형 생각이 났다. 형이랑 농구 하면 백날 지기만 했어도 재밌었는데, 지금은 이기고 있음에도 왜인지 별 감흥이 없었다. 그래서 빨리 끝내 버리자는 생각이었다. 성가시게 쏟아지는 훈수를 한 귀로 흘리며, 동현은 바운드되는 공에 집중했다. 지면을 치고 올라오는 순간, 손바닥으로 툭 쳐서 빼앗았다. 그러고는 지체 없이 슛. 가뿐히 2점을 벌었다. 앞으로 1점이면 게임 끝.
“애인도 없는 게.”
“인마!”
하나 마나 한 잔소리에 묵직한 팩트로 응수했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였다. 어렴풋이핸드폰 벨 소리가 들려왔던 것은.
동현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다리가 재빨리 짐을 놔둔 자리로 움직였다. 옷가지 사이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자 상혁이 형. 동현은 반색하며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댔다. 그런데 받자마자 뚝, 전화가 끊어져 버린다. 곧바로 다시 걸었을 땐 어째선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야, 내가 졌어.”
동현은 저를 기다리는 동료들을 향해 대뜸 통보했다.
“먼저 간다.”
서둘러 겉옷을 챙겨 입고, 가방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러고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농구 코트를 벗어났다. 뒤에서 “야! 갑자기 어디 가!”라고 소리치는 게 들렸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발걸음만 하염없이 성급해질 뿐이었다.
집요하게 굴면 질린다고? 그러다 도망갈 거라고?
“야! 동현아, 여기!”
그렇지만 좋아하면 같이 있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메시지를 받고 바삐 달려온 곳은 한 요리 주점이었다. 장수가 이곳으로 상혁을 데리러 와 줄 수 있느냐고 SOS 요청을 한 것이다. 보랏빛 조명이 은은하게 쏟아지는 내부엔 사람이 절반쯤 차 있었다. 그 안에서 190센티의 거구를 발견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양손을 번쩍 치켜드는 장수는 구석 자리에 있었어도 단연 눈에 띄었다.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어차피 할 것도 없었고.”
“상혁이가 완전히 맛이 가 버려서.”
“얼마나 마셨길래 이래요?”
“자식들, 그동안 안 놀아 줬다고 어찌나 심술을 부리는지…….”
서두르느라 돌아간 모자를 고쳐 쓰며, 동현은 자리를 훑었다. 상혁이 엎어진 테이블 위엔 그 상태가 단번에 납득이 갈 만큼 방대한 양의 술병이 쌓여 있었다. 거기서 절반 가까이 상혁의 입으로 들어갔다니 말 다 했다. 동현은 취기가 올라 발그레한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뜨끈뜨끈했다. 건드는 손길에 입매를 꿈질대면서도 상혁은 쉬이 깨어나지 않았다.
“취하니까 자꾸 너를 찾더라.”
“그래 놓고 지금은 잠만 자네.”
“둘러대느라고 진땀깨나 뺐다.”
“일단 제가 데려갈게요.”
“그래라. 그러는 게 좋겠어.”
부축해서 데리고 나가긴 무리일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곤히 자는 사람 깨우기도 그랬다. 동현은 무릎을 굽히고, 상혁의 팔을 끌어당겨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축 늘어진 몸 전체가 스르르, 저항 없이 딸려 오며 등 위로 올라탄다. 장수가 옆에서 상혁을 업는 걸 도왔다.
“마침 다들 담배 태우러 갔으니까 얼른 가.”
“네.”
“여기 더 앉아 있다가 괜히 말실수라도 하면 너도 곤란하잖아.”
재촉하는 목소리는 비밀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껏 기어들었다. 어차피 시끄러워 잘 들리지도 않건만. 동현은 장수를 힐끔 돌아보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체를 살짝 들썩여 업힌 몸을 추슬렀다. 상혁이 “으응…….”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 갈게요, 형.”
“어어, 조심히―.”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고 막 떠나려던 찰나였다.
“……어?”
저벅저벅,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소리도 함께. 아직 한 걸음도 떼기 전이었다. 때마침 자리로 돌아온 사람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낯설었지만 누구인지는 말 안 해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상혁을 녹다운시킨 짓궂은 친구들. 크게 당황한 기색 없이, 동현은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했다. 친구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아, 예.” 하고 얼떨떨하게 그 인사를 받는다. 동시에 모자챙에 가려진 동현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토끼 눈을 뜨며 물어왔다.
“김동현 선수, 맞죠?”
―
“그래서 그때 상혁이가…….”
변수란 본디 연쇄적이라고 하던가. 그러니까 모든 것이 변수인 날이었다. 형이 약속이 생겨 마중을 나오지 않았던 것도 변수, 평소답지 않게 만취한 형을 데리러 가게 됐던 것도 변수,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던 형의 친구들이 금방 돌아온 것도 변수, 결국 딱 마주친 것도, 팬이라며 눈을 반짝였던 것도, 그래서 잠깐만 앉았다가 가시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하고 얼결에 합석을 해 버렸던 것도…… 전부 다 뜻밖의 변수였다.
“그거 진짜 골 때렸었는데.”
“우리가 그 일 있고 확 친해졌지, 아마?”
“생각해 보면 1학년 때가 진짜 재밌었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기훈과 범석. 상혁이랑은 중학교 때부터 친구라고 했다. 같이 수영부 활동을 했었던. 짓궂은 친구들이라고 들었으나 막상 말을 섞어 보니 평범하게 유쾌했다. 술이 들어가서인지 화제는 줄곧 과거에 머물렀다. 이를테면 중학교 시절 얘기. 쏟아지는 추억의 홍수 속에서 동현은 잠자코 자리를 지켰다. 그때를 잘 모르니 대화에 낄 순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 시간이 지루하진 않았다. 제게는 생소한 중학생 이상혁을 알아가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아, 미안해요. 붙잡아 놓고 너무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 했네.”
“아니요, 재밌어요. 평소에도 형한테 이런 거 종종 물어보거든요.”
“그럼 상혁이가 얘기해 줘요?”
“형도 수영부 얘기를 제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와…… 상혁이 절대 자기 얘기 아무한테나 안 하는데, 둘이 진짜 친한가 보다.”
맞은편 자리의 기훈이 동현을 향해 빈 잔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한잔하시겠느냐는 의미였다. 그에 동현은 손을 가볍게 내저으며 사양했다. 상혁을 데려가야 할 제가 덩달아 취해 버리면 안 되니. 다행히 염려했던 것과 달리 그들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아무래도 동현에겐 술을 먹일 친분도, 명분도 없어서다.
“그럼 혹시 상혁이가 여자친구 얘기는 안 해요?”
“……여자친구요?”
“네, 따로 들은 거 없으세요?”
뜬금없는 발언에 동현은 눈을 끔뻑거렸다.
“놀자고 불러도 바쁘다고 하고, 와서도 내내 핸드폰만 보고, 빨리 가려고 하고…….”
“…….”
“이거 백 퍼센트 누가 생겨도 생긴 건데 떠보면 아주 교묘하게 피해 간다니까요.”
기훈의 옆에서 범석이 하소연을 거들었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슬슬 감이 잡혔다. 형이 이기지도 못할 정도로 술을 마신 이유. 분명 어지간히 시달렸을 테다. “여자친구 생겼지?”라든가 “어떤 사람인데?”라든가, 남 연애사에 말 얹기를 좋아하는 친구들의 불필요한 관심에. 그것을 술로 적당히 때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야 형의 입장에서는 달리 해 줄 말이 없으니. 만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고, 김동현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리가.
“글쎄요, 그런 얘기까지는 안 해서.”
동현은 상혁의 장단에 맞춰 주기로 했다.
“근데 형은 멋있으니까…….”
그러는 게 썩 내키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누가 진작에 채 갔을 것 같기도 하고.”
동현의 시선이 느리게 옆자리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몇 번씩 벌어질 동안에도 상혁은 엎어져 잘만 잤다. 턱을 괴지 않은 한 손을 무심코 뻗었다. 비스듬히 기운 귓바퀴를 엄지로 살며시 쓸었다. 간지러웠는지 상혁이 잠결에 고개를 움츠렸다.
“그, 그나저나 너 이렇게 오래 앉아 있어도 괜찮냐?”
“아, 시간이 벌써…… 슬슬 일어나야겠어요.”
“어어, 그래. 얼른 가. 바쁜 사람 우리가 너무 귀찮게 했다.”
“상혁이 형은 제가 잘 데려다줄게요.”
“같이 나가자. 그래도 너 가는 건 봐야지.”
“그냥 앉아 있어요, 형.”
“아니야. 야, 나 동현이 배웅 좀 하고 올게.”
묘한 낌새를 느낀 장수가 황급히 주의를 환기했다. 별생각 없이 상혁을 지분대던 동현이 그제야 손길을 거둔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어느새 한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원래 삼십 분 정도만 있을 계획이었는데. 내일도 일찍부터 훈련 스케줄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슬슬 돌아가야 했다. 동현은 의자를 멀찌감치 밀어 내며 일어섰다. 곯아떨어진 상혁을 아까처럼 조심스레 둘러업었다. 이윽고 덩달아 자리를 털고 일어난 두 사람과 만나서 반가웠다고, 가벼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후, 오늘 고생 많았다.”
장수는 건물 밖까지 동현을 배웅했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그가 굵은 한숨을 터트렸다. 마침내 긴장이 풀어진 듯이. 동현의 팔뚝을 툭 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본의 아니게 여태 붙잡아 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저것들 지금 취해서 더 그래.”
“고생은요. 재밌었어요.”
“아무튼 조심해서 가. 연락하고.”
“네, 다음에 봐요.”
동현의 발걸음이 먼저 떨어졌다. 뒤이어 장수도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움직였다. 그런데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막 잡았을 때였다. 그대로 가는 듯싶던 동현이 다시금 장수를 불러 세웠다.
“아, 근데 형.”
장수가 멈칫하곤 동현을 돌아보았다.
“저 별로 안 곤란해요.”
눈이 마주치자 동현이 대뜸 그랬다. 의미를 모를 얘기에 장수의 표정이 의아하게 변했다. “응?” 하고 되물으며 이해를 도울 뒷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동현은 설명을 하는 대신 씩 웃더니 또다시 홀연히 돌아섰다.
“갈게요.”
―
“어이쿠, 과음하셨나 보네.”
골목을 벗어나 한길로 나오자 늦은 시간임에도 아직 지나다니는 사람도, 달리는 차들도 많았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택시를 잡아탈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인사불성으로 뒷좌석에 픽 널브러지는 상혁을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핼끔거렸다. 그다지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원래 이때쯤 되면 길바닥에 널리고 널린 게 취객이라.
“어디로 갈까요?”
“아, 저기―.”
기사는 상혁을 챙기느라 한발 늦게 차에 오른 동현에게 물었다. 동현이 문을 탁 닫으며 목적지를 대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군가 동현의 대답을 가로채 갔다.
“서울, 서울숲…… 국민…… 체육 센터…….”
택시 안엔 단 셋뿐이니 당연히 상혁의 짓이었다. 동현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상혁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술에 취해 정신 못 차리던 그가 어느덧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 있었다. 완전히 깬 것 같지는 않았다. 눈동자가 흐리고, 몸이 흐느적거리는 그대로였던 걸로 보아. 상혁은 비몽사몽 중에 체육 센터로 가 달라는 말만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동현이 몇 번씩이나 정정하려 했지만, 끝끝내 갈 거라고 우겨 댔다.
“거기는 우리 집이 아닌데.”
“갈 거야아…….”
푸우, 상혁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후더분한 숨을 토했다.
“동현이…… 데리러…….”
몸을 고물고물 뒤척이다 동현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궜다. 그러고는 개미만 한 소리로 옹알거렸다.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이 도로 감겼다. 반면에 동현은 눈을 크게 떴다. 왜 자꾸 센터로 가자고 하는지 의문이었는데, 그런 이유였었다니. 푸시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허벅지를 짚은 손에 조용히 힘을 주어 버텨 본다. 무심코 형을 끌어안을까 봐서. 아아. 형은 매번 이런 식이야. 정말로 약았어.
“체육 센터로 가 주세요, 기사님.”
어쩜 이렇게 괴롭도록 사랑스러운지.
결국 딴 길로 새고 말았다. 택시는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이 달려서 애초 목적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 멈춰 섰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어디에 있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구와 있느냐가 중요하지. 이상혁이 가자고 하면 김동현은 그냥 가는 거였다. 여태껏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곳이 어디라도 기꺼이.
“형, 춥지 않아요?”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 체육 센터 문은 당연하게도 굳게 닫혀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켜져 있던 옥외등도 이미 소등된 채였다. 기껏 여기까지 왔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부쩍 쌀쌀해진 가을바람과 맞서는 일뿐. 상혁은 공터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나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여지없이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야.”
“네.”
“나…… 갈 거야.”
“어디를?”
“동현이한테.”
이걸로 몇 번째더라. 아마도 대여섯 번째쯤. 동현은 그 사실을 상혁에게 굳이 알려 주지 않았다. 듣기 좋아서 일부러 계속하게 두었다. 한마디로 사심 채우기. 상혁의 앞에 서서 바람을 막아 주던 그가 문득 다리를 접어 몸을 낮추었다. 쪼그려 앉은 채 상혁을 올려다봤다.
“동현이 여기 있는데?”
동현은 쓰고 있던 캡 모자를 벗었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머리칼을 치웠다. 제 얼굴이 상혁에게 잘 보이도록.
“……어?”
감길락 말락 하던 상혁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동현이 했던 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취기와 잠기를 털어 냈다. 그러고는 얼마간 동현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저를 대신해 차가워진 뺨을 조물조물 어루만졌다. 김동현이다. 진짜 김동현. 예쁜 내 새끼.
“언제 왔어?”
“아까 전에.”
상혁의 눈이 커지니 동현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친구들이랑 있다가 형이 불러서 달려왔지.”
실눈이 되도록 눈꼬리를 접으며 동현은 말했다. 상혁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몽롱한 와중에 더듬더듬 동현의 번호를 누른 것 같기도. 뺨을 감싸 쥔 손이 멈칫했다. 어렴풋이 떠올린 그가 왜인지 생각에 잠겼다. 별말도 아니건만 “내가 불러서…….” 입속말로 동현의 대답을 곱씹었다.
“그래도 돼?”
이윽고 작게 달싹대던 입술이 열렸다.
“친구들 두고 나한테 와도 괜찮아?”
“…….”
“요새는 계속 나랑만 놀았잖아, 너.”
미안한 기색을 비치며 상혁은 물었다. 바람에 동현의 머리가 날렸다. 쓸어 넘겨 주고, 또 넘겨 줘도 금방 다시 헝클어졌다. 산발을 하고 동현이 배시시 웃었다. 만져 주는 손길이 그저 좋다는 듯이. 그는 은근슬쩍 상혁의 품으로 파고들어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응…… 괜찮아.”
어리광 섞인 목소리가 가슴팍에 파묻혀 뭉개졌다. 안겨 들어 간지러울 정도로 비비적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개와 닮았다. 자기가 다 컸는지도 모르는 대형견. 귀여워서 살짝 미소 짓다가도 상혁은 여전히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턱 밑에서 살랑대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헤집으며 재차 떠보았다.
“넌 안 지겨워?”
“뭐가요?”
“나랑 노는 거.”
동현이 고개를 빼꼼히 들어 올렸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느냐고, 눈빛으로 되물었다. 상혁은 “음…….” 하고 뜸을 들이다 쭈뼛쭈뼛 망설이던 말을 이었다.
“그…… 내가 좀 들떴어.”
“…….”
“그래서 나도 모르게 질리게 굴지도 몰라.”
그러자 이번엔 동현의 고개가 기우뚱했다. 그 말을 들어도 여전히 알쏭달쏭하기만 했다. 질린다니, 형이 무슨 수로 그렇게 할 텐가. 그건 형의 조상님의 조상님이 와도 못 할 텐데. 차라리 물을 반으로 가르거나 물 위를 걷는 편이 더 빠르다. 그만큼 말도 안 되니까 도리어 궁금해졌다. 질리게 하는 거, 그거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그게 어떤 건데요?”
“너랑 계속 같이 있으려고 한다거나…….”
상혁이 동현의 어깨 위로 팔을 툭 늘어뜨렸다.
“오늘처럼 잠깐을 못 참고 너한테 전화한다거나.”
턱을 당겨서 동현과 진득하게 시선을 얽었다. 말간 눈동자는 한밤중인데도 햇빛이 내리쬐는 한낮의 바다 같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바다. 거기에 내가 담기는 순간이 좋아. 바라보고 있자면 가슴에 속절없이 파도가 쳤다. 닿고 싶고, 안 하던 짓을 하고 싶어져. 그러니까 그게 문제다. 너만 보면 주체가 안 되는 게. 미지근하던 내가 뜨거워지는 게.
불현듯 친구들과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스쳤다. 아까 술자리에서의 일이었다. 애인 생겼다고 단 한마디도 꺼낸 적 없었다. 그런데 오지랖 넓은 놈들이 멋대로 동현을 여자친구라고 넘겨짚곤 한바탕 훈수를 뒀다. 너무 목을 맨다고 했다. 어른의 여유가 없단다. 그런 남자는 매력 없다는 둥 금방 질릴 거라는 둥, 술이나 마시자고 회유해도 끝끝내 실컷 악담을 퍼부었다. 개새끼들. 헤어지라고 아예 고사를 지내지, 왜.
“아이씨, 나 스물여섯 살인데…… 사춘기 애마냥 뭐 하는 짓인지.”
상혁이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숨기듯이 움츠린 그의 목덜미며 귓가가 온통 발갰다. 아직 정신을 덜 차렸던 게 틀림없다. 분명히 취해서 그런 걸 거다. 이렇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끈거리는 것도,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낯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것도. 나중 가면 이불 차고 후회할 볼썽사나운 주사일 테다.
“모르겠어. 누구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걸 어떡―.”
쪽. 입맞춤은 급작스러웠다. 상혁의 반쪽짜리 시야에 순식간에 동현의 얼굴이 가득 찼다. 말꼬리가 맞물린 입술 사이로 삼켜졌다. 그러니까 내가, 쪽, 하고 싶은, 쪽, 말은, 쪽…… 몇 번이고 계속, 술김에 털어놓은 부끄러운 진심을 그가 먹어 치웠다. 상혁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답답함에 못 이겨 결국 동현의 얼굴을 콱 잡아떼었다.
“야, 나 말, 말 좀―.”
“형, 요즘 내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요?”
겨우 말 좀 하려니까 또 선수를 빼앗겼다.
“형이 나랑만 놀았으면 좋겠어.”
“…….”
“형이랑 하루 종일 붙어 있고 싶어.”
뺨이 한껏 짜부라진 채로 동현은 말했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데.”
“와, 이 형 봐.”
“……아니야?”
“진짜 나쁜 남자다.”
“어쭈, 불평하냐?”
“아직 반도 못 했어요.”
서운함이 밴 말투였다. 형에게 투정을 하자면 한두 개로는 안 끝났다. 자신이 형을 좋아하고, 당장 기분이 째지는 것과는 별개로. 동현은 다시금 상혁의 품으로 상체를 무너트렸다. 가슴팍에 코를 박았다. 숨을 습, 들이켜자 덕지덕지 묻은 바람 냄새와 술 냄새 사이로 옅게 체향이 맡아졌다.
“형은 대체 왜 그렇게 바빠요? 이 세상 만화 형이 다 그려?”
“…….”
“동거하면 형이랑 계속 붙어 있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툭하면 방에서 안 나오고, 나 혼자 잠들게 하고…….”
“…….”
“그럴 거면 때려치워 버려.”
유치하다는 건 안다. 그렇지만 사랑은 원래 좀 유치한 거잖아? 팀원들은 저더러 집요하게 군다고 했으나 사실 그건 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자신은 아직 반의반도 보여 주지 않았다. 시커먼 속내를 알고 나면 다들 혀를 내두르고, 질색을 할 것이다. 마음 같아선 형을 1분 1초도 빼앗기기 싫었다.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고 싶다는 말, 그냥 농담으로 하는 소리겠거니 여겼었는데 요즘은 십분 이해했다. 형의 모든 순간을 독차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형을 만나기 전엔 세상에서 운동이 제일 힘들었었다. 그런데 형을 만나고부터는 늘 형 때문에 힘이 들었다. 좋아서 괴롭다. 좋아하는 만큼 더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나는 원래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닌데.
“둘이서 열심히 벌기로 했잖아.”
“혼자 벌어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어요.”
“내 집 마련 안 할 거야?”
“내 집은 서울에만 없는 거거든요.”
“푸흐…….”
투정을 얌전히 받아 주던 상혁이 작게 웃음보를 터트렸다.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어깨는 바들거렸다. 웃음소리는 점차 커져 갔다. 등받이에 맺힌 밤이슬을 흔들며 적막한 공터에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어때요, 내가 더 후지죠?”
상혁은 말없이 동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부스스한 머리카락 틈으로 입술을 묻었다. 웃음기는 그때까지도 가시지 않고 입가를 잔잔히 맴돌았다. 피식피식 새는 입바람이 머리꼭지를 간질였다. 허무해서 그랬다. 뭔가 괜한 걱정을 했던 것 같다. 허무할 만큼 별것도 아니었구나란 생각이 든다. 예전에도 지금도 철없이, 뜨겁게 타오르는 너를 안고 있으니.
우리는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 조금은 애들처럼 사랑해도 좋을 거야. 오래전 어느 여름날의 우리처럼. 언제든, 어디서든, 부르면 전력으로 달려가던 그때처럼.
“우리 끼리끼리 잘 만났네.”
품을 메우는 익숙한 부피감과 체온은 묘한 안정감을 선사했다. 오직 너만이 줄 수 있는 감각. 가끔 너는 내게 딱 맞게 설계된 완벽한 존재 같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만나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몰라. 마음이 편해지자 소르르 졸음이 밀려왔다. 완전히 쫓지 못한 수마가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가물거리는 와중에 문득 생각했다.
“천생연분이라고 해 줘요.”
너랑 나, 평생 오늘 같은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다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상혁은 동현의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몸이 둥실둥실, 기분 좋게 오르내렸다. 꼭 바다색 하늘을 떠다니는 듯이. 어디선가 희미하게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춰 무심결에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었다. 귀에 익은 멜로디는 감미로운 자장가였다. 노곤한 몸을 부추기듯 다독였다. 그대로 또 곯아떨어질 것만 같았다. 졸음을 떨치려 눈을 박박 문질러 본다. 하품을 뱉으며 묻고 있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형형색색 화려한 도시의 불빛들. 육교를 건너는 중이었다. 해 질 무렵이면 함께 야경을 구경하던 바로 그 육교였다.
같이 산 지 벌써 3개월이 넘었네.
혼잣말을 중얼대자 휘파람 소리가 멎었다. 동현이 뒤를 힐끔 돌아보며 깼느냐고 알은체를 했다. 그러고는 뒤척임에 흘러내린 몸을 가뜬히 추켜올렸다.
너랑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어.
그만 내려야지, 생각하면서도 막상 꼼짝을 안 했다. 아이를 한번 안아 주기 시작하면 계속 안아야 하는 것처럼, 한번 편하게 업혀 버린 몸뚱이는 은근슬쩍 두 발로 땅을 딛고 서기를 거부했다. 받쳐 주는 등판은 든든했고, 마냥 기대고 싶어졌다. 목에 두른 팔을 살며시 조였다. 어차피 오늘은 연장자로서의 체면도 깎였겠다, 술을 핑계 삼아 실컷 응석이나 부리기로 했다.
시간 개념 완전 바보 됐어.
나도 그래요.
너도?
나는 요즘 요일 두 개로 살아.
상혁은 미심쩍은 눈으로 동현을 바라보았다.
형이 안 오는 날은 월요일이에요.
……허?
형이 오는 날은 금요일이고.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람. 물론 녀석이 언제는 별나지 않았냐마는. 하다 하다 일주일을 이틀로 줄여 버리는 기행에 절로 헛웃음이 나오는 한편, 내심 궁금해졌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너에게 어떤 하루였는지.
그럼 오늘은 무슨 요일이야?
음, 오늘은 금요일이지.
동현이 바보같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좀 특별한 금요일.
이윽고 끊겼던 휘파람 소리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들뜬 마음을 대변하듯 한층 높고 경쾌하게. 상혁은 픽 웃곤 눈을 돌렸다. 멜로디를 따라서 흥얼거리며 야경을 마저 구경했다. 왜인지 좀 전보다 더욱 황홀했던 광휘에 취해 곰곰이 사색에 빠졌다.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그러나 상혁은 곧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사실 뭐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녀석이 금요일에 산다면 자신도 금요일에 살겠다.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았다. 너의 하루가 내게 달렸다면, 나의 하루 역시 너로 결정되기에.
그거 좋네.
네가 원한다면, 나는 기꺼이 바보가 될 수 있었다.
fin.
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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